아이디어 제안서를 쓰고 심사를 받고 발표를 하고 (운이 좋으면) 국가나 재단의 기금을 받아서 작업하는 나는 일 년에 한 번 정도는 심사위원의 위치에서 다른 작품을 심사하곤 한다. 심사직을 맡는 일은 나에게는 극히 드문 일인데, 대부분 공모가 있는지 몰랐거나, 또는 아예 자격이 안 되어서(나이…) 어쩔 수 없이 공모를 지원하지 못하고 놀고 있을때, 이런 나를 굳이 심사위원으로 초대했기에 그나마 감사히 수락하는 경우이다.

얼마 전, 320명의 정성 어린 제안서를 읽고 또 읽고, 보고 또 보고, 파악하고 연구하고 구글까지 하면서 꼬박 나흘을 보냈다. 심사의 기술을 갖고 있지 않은 내가 모든 작품을 동등한 잣대로 평가하려니 각고의 집중력, 상상력 그리고 공감력을 발휘해야 했다. 100명을 추리고, 다시 50을 추리고, 종국에 20을 뽑고 난 후에는 몸살 기운과 구강염이 스멀스멀 올라오더라. 그럼에도 320개의 프로포절을 읽는다는 것은 나에게는 큰 공부였고 감사한 일이었다.

큰 공부를 했으니 배운 핵심을 나누려고 몇 자 적는다. 제안서를 쓰는 나나 당신들이 ‘알면서도’ 놓치는 그것들을.

1. 작품 제안서는 어려운 논문이나 칼럼이 아니다. 쉽고 간결한 문체로 누가 읽어도 이해가 되어야 한다. 어려운 단어와 문체가 작가 철학의 깊이를 대변하지 않는다. 깊이 있지만 쉽게 쓰는 것이 더 어려운 일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본인이 쓴 글을 읽고 또 읽으며 수정을 반복해야한다.

2. 작품 아이디어의 배경과 역사를 알게 되면 그 아이디어가 설득력 있게 다가온다. 작품의 개념이 어떠한 동기에서 시작되었고 왜 작가가 그 개념에 안착했고 집착하는지 ‘쉽고’ 간결하게 설명하는 것은 중요하다.

3. 이러한 개념이 어떠한 최종 아웃풋으로 탄생할지 가급적 상세히 기술하면 좋다. 어떻게 구동할 것이며 (주로 미디어작품이기에) 그것이 관객과 어떻게 마주칠 것인지, 주재료는 무엇이며, 주요 기술은 어떤 것이며 왜 그 기술이 여야 하는지, 작품의 사이즈와 작품이 놓일 공간의 구성은 어떠해야 하는지, 사운드와 조명은 어떠할 것인지 등등…

4. 이러한 것들이 손으로 그린 스케치이든, 컴퓨터 시뮬레이션이든, 실재 프로토타잎이든, 시각적인 자료로 반드시 제시되어야한다. 타인의 작업을 레퍼런스 시각자료로 종종 제시하는데 이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적어도 나에게는..). 본인의 자료로 아이디어가 구현될 수 있다는 믿음을 주어야한다.

5. 부가적인 자료들을 반드시 첨부한다. 기관의 정형화된 문서양식이 있더라도 별도로 작품의 제안서를 본인의 양식으로 디자인해서 풍부하게 기술한 후 PDF등으로 첨부해도 좋다. 포트폴리오는 응당 기본이며 테스트 동영상 사진 등을 첨부하는 것도 기본이다. 이는 작가의 열정과 전문성을 보여준다. 작가도 전문직 아니던가. (무엇보다도 기관은 정형화된 양식을, 특히 아래한글로 된 양식을 이제는 버려야만 한다.)

6. 표절 아이디어는 절대 제안하지 않는다. 다 안다. 세상이 인터넷으로 뻥 뚫려 시시콜콜 주시하고 있는데 도대체 무슨 용기로 다른 작품과 닮아도 너무 닮은 아이디어를 밀어 넣는단 말인가…

7. 이력서에 예전 작업들을 기재할 때 크레딧을 주의깊게 기술한다. 마치 그 큰 프로젝트를 혼자 다 한 것처럼 기술하는 무식한 오류를 조심해야 한다.

8. 작업 예산표를 보면 작가의 전문성이 보인다. 작업의 프로세스를 잘 알고 있는지 아니면 허황한 기술의 열거인지…

9. 정정당당 작가비를 청구해야만 한다. 작가비 항목이 없으면 전화해서 왜 없냐고 물어라도 봐야한다. 돌아오는 답변은 늘 똑같을 지언정…
(어쨌거나 보조금이란 명목으로 작가비를 책정하지 않는 기관의 비인륜적인 행태는 사라져야 한다)

10. 위의 조언은 순전히 ‘주관적’ 임을 참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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