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랑 드 보통의 “철학의 위안”이라는 책을 보면
철학적 관점에서의 “불만”을 정의해 놓았는데,
“불만”이란 내가 품은 욕망이 현실이라는 벽에 부딪혀서
이루어지기 힘든 상황을 마주했을때
불끈 튀어나오는 “잘못 정립된 이성”이라 한다.

이는,
지극히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기준점을 정해놓고
이 기준점에 부응하지 않는 세상을 향해
무차별적으로 화를 내는 비이성적인 행동이라할 수 있다.

고로,
다양한 경험과 성숙한 성찰로
세상을 향해 커다란 문을 열어놓는다면
그 어떤 세상의 반응에도
“억울하다. 불평등하다” 등으로 화를 내는 것이 아니라
“그럴수있다” 라는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

결국..
이것 또한…
“내탓이로소이다” 컨셉.

철학… 정말 매력적이지 아니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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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의 위안 ; 불안한 존재들을 위하여 / 알랭드보통

Page 31.

사람들이 틀릴 수 있는 이유는 간단하다. 자신의 신념을 논리적으로 검증하지 않기 때문이다.  메론과 앞에서 말한 장군들은 불완전한 관념들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 이유는 널리 받아들여지던 규범을 논리적으로 점검하고 않고 그대로 흡수했기 때문이다. 그런 수동성의 특성을 꼬집기 위해서 소크라테스는 사람들이 체계적인 사고를 하지 않은 채 인생을 사는 것을, 도자기를 굽거나 구두를 만들면서도 그 기술적 과정을 모르고 있거나 따르려고 하지 않는 것에 비유했다. 직관에만 의존해서는 훌륭한 도자기나 구두는 상상조차 할 수 없다. 하물며 한 인간의 삶을 영위하는 더욱 복잡한 일을 어떻게 근거나 목표에 대한 지속적인 반성없이 수행할 수 있다고 단언할 수 있을까?

……..

Page 34.

소크라테스는 이런 복잡성을 존중하지 않고, 또 최소한 도공만큼의 엄격한 태도도 보이지 않은 채 자신의 견해를 거리낀 없이 드러내는 사람들의 확신에 절대로 주눅 들지 말도록 우리에게 용기를 불어넣는다. 너무나 명백한 것이라거나 “당연한” 것으로 선언된 것들 중에서 실제로 그런 것은 거의 없다.

이런 사실을 인정하면, 우리는 이 세상도 겉으로 보이는 것보다 훨씬 유연하다는 진리를 배우게 될 것이다. 왜 그런가 하면, 기존의 확고한 견해들이 완벽한 추론 과정을 통해서 태어난 것이 아니라 종종 몇 세기에 걸친 지적 혼란 상태에서 나타났기 때문이다. 모든 것들이 현재의 모습 그대로여야 할 이유는 결코 없다.

Page 35.

상식을 검증하는 소크라테스의 방식.

어떤 진술이 정확한지 여부는 그것이 과반수에 의해서 받아들여지느냐 또는 오랜 세월 동안 중요한 인물들에 의해서 믿어져왔느냐에 따라서 결정되어서는 안 된다고 암시한다. 정확한 진술이란 이성적으로 결코 모순되지 않는 것을 말한다. 하나의 진술은 오류가 증명될 수 없어야 진리가 될 수 있다.

Page 76.

쾌락주의(Epicureanism)의 핵심에는 “무엇이 나를 행복하게 만들까?”라는 질문에 대해서 직관적으로 대답하는 데에 우리 모두가 서툴다는 생각이 깔려 있다.

Page 79.

행복, 에피쿠로스의 구매 리스트

  1. 우정
  2. 자유
  3. 사색

Page 224 수상록 예제

Page 268

“천부의 잘못이 딱 하나 있다. 우리는 행복해주기 위해서 존재한다는 관념이 바로 그것이다. 이 천부의 잘못을 우리가 고집하는 한 … 이 세상은 모순으로 꽉 차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 이유는, 우리가 위대한 일에서든 아니면 하찮은 일에서든 이 세상과 삶은 행복한 존재를 돕게 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을 경험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늙은 사람들의 얼굴을 보면 거의 대부분 실망이라고 부를 만한 표정을 짓고 있다.” –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쇼펜하우어.

Page 289

“쾌락과 불만은 서로 단단하게 묶여 있기 때문에 한 가지를 가능한 한 많이 원하는 사람은 누구나 불가피하게 다른 한 가지도 경험할 수 밖에 없다…. 당신은 선택을 해야 한다. 불만을 가능한 한 적게 경험하면서 고통 없는 시간을 짧게 가지든지… 아니면 이제까지 좀처럼 누리기 힘들었던, 형언하기 어려운 쾌락과 환희를 즐기면서 그 대가로 불만을 가능한 한 많이 겪든지,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만약 전자의 길을 결정하고 인간적인 고통의 정도를 줄이거나 낮추기를 원한다면 그대는 또한 그 고통이 줄 수 있는 환희에 대한 기대의 수준도 줄이고 낮추어야 한다. “ 즐거운 학문 중, 니체

Page 292

니체에 따르면, 만약 대부분의 문학작품들이 ‘적과 흑’에 비해서 작품성이 떨어진다면, 그것은 그 작품의 작가들이 천재성을 결여해서가 아니라 작품을 창작하는 데에 따르는 고통이 얼마나 큰 것인지를 잘 몰랐기 때문이다. 이는 하나의 소설 작품을 남기려면 얼마나 많은 피와 땀을 쏟아야 하는지를 말해주는 대목이다.

“훌륭한 소설가기 되기 위한 비법을 내놓기는… 무척 쉽지만, 그 비법을 실천에 옮기는 데에는 사람들이 ‘나는 재능이 부족해’ 라고 말할 때 흔히 간과해버리는 그 자질들이 요구된다. 작가를 희망하는 사람은 소설을 위한 밑그림을 100편 정도 그리되 밑그림마다 두쪽을 넘기지 않아야 하고, 또 그 밑그림에 동원된 단어들은 거기에 꼭 들어맞는 정확성을 확보해야 한다. 그리고 매일 매일 일상의 일화들을 적어두어야 한다. 그런 것들을 가장 충만하고 효과적인 형식으로 다듬는 요령을 터득할 때까지 그리고 …..”

Page 283

니체가 쇼펜하우어(염세주의)의 가르침, 일반론적인 명제들 중 동의하지 않는 특히 하나는…

“인간의 완성이란 환상이기 때문에 현명한 사람이라면 쾌락을 추구하기보다는 쇼펜하우어가 조언한 것처럼 “방화시설이 잘된 자그마한 방안에 틀여박혀” 조용하게 살면서 고통을 히하는 데에 자신을 바쳐야 한다는 주장이다. 이런 주장은 이제 니체에게는 어리석고 진실과 거리가 먼 허튼 충고로 와닿았으며, 니체가 몇 년 뒤 경멸적으로 표현했듯이, 그것은 ‘수줍은 사슴처럼 숲속에 숨어 안주하려는’ 터무니없는 노력으로 비쳤다. 완성이란 고통을 피함으로써 달성되는 것이 아니고, 고통의 역학을 ‘선한 무엇인가를 이루는 과정에서 겪는 자연스럽고 또 피할 수 없는 단계’로 인정함으로써만 달성할 수 있는 거시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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