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위 문명이 싹트면서, 정치와 경제가 발전(?)하면서 Sexism은 다양하고 교묘한 방법으로 여성과 남성의 삶에 뚜렷한 높낮이를 만들었다. 오랜시간 동서양을 막논하고 여자는 남자의 (아버지에서 남편에서 아들에 이르기까지) 전유물이였음을 역사가 보여준다. 기나긴 문명의 시간을 통틀어 고작 1900년대가 넘어서면서 이곳저곳에서 천천히 여성들의 선거권이 주어지기 시작했다. 그것도 장렬한 투쟁으로 겨우 쟁취. 우리나라도 1947년 처음 여성 선거권이 주어졌다. 도대체 선거권이 없었던 여성은 한 나라의 어떤 존재적 의미를 갖았던 것일까?
법과 사회적 체제가 얼마나 남자의 관점에서 만들어져 수천년을 군림해왔는지는 여성의 선거권 운동(Woman Suffrage) 만 보더라도 파편적으로나마 알 수 있다.

Photo ) Pankhurst being arrested; resisting the police

요 며칠 안희정 사건 등 편견이 서린 여러 판결들을 보면서 견디기 힘든 분노를 유연하고 합리적으로 표출하려고 (개)노력하고 있다. 왜 이런 불필요한 노력을 우리는 여전히 해야하는 걸까.
부정하기 힘든 성불평등의 과거와 현실을 외면하고자 하는 이들은 sexism이나 feminism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을 ‘분노장애’나 ‘피해의식’을 조절못하는 미성숙한 사람으로 펌하하려 한다. 수천년의 잔인한 군림을 대를 이어 전하려하는 소수의 남자들이 참으로 치사하고 졸렬하다. (소수라 믿고 싶다)

현우가 4학년때였던가… 집에 와서는 학교에서 여자와 남자를 차별한다고 투정을 한적이 있다. 남자애들이 여자애들을 때리면 엄청나게 혼이 나지만, 여자애들이 남자애들을 때리면 주의를 받는 수준이라고 불평등 하다고.

“오랜시간 불평등 속에서 존재해온 여자와 남자 사이에 균형을 맞추려면 좀 과격한 과도기가 필요할지도 몰라.” 라고 나는 말해주었고 11살 현우는 뭔소리를 하는건지 라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알아듣건 못알아듣건 일관성있게 지속적으로 이야기하다보니 그래도 13살 지금의 현우는 엄마의 말을 알아듣는 척은 한다.

투쟁이 아닌 대화나 공감으로 세상을 바꾸려면 말랑말랑한 뇌를 갖은 아이들에게 올바른 교육을 시켜야한다. 아빠와 엄마 사이의 불평등을 보는 아이는 고스란히 그것이 균형이라고 믿는다. 미디어에서 쏟아지는 수많은 성의 상품화를 일일이 바로잡아 교육하기 힘든것이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부모가, 선생님이, 가까운 어른들이 일상에서 보여주는 뚜렷한 철학은 100만 팔로우어의 유투버 보다 훨씬 영향력이 크다.

Sexism의 어원은 여성을 차별하는 문단을 비꼬며 Racism에 빗대어 말함으로 생겨났다. 성차별, 인종차별, 소수를 차별하는 사회는 비문명이다. 언어와 생각을 하고 있다고 우리가 문명인이라고 믿는다면 큰 오산이다. 시간이 지나 스스로 자연도태되겠지만 그래도 그시간을 기다리자니 모두가 너무나 피곤한 삶을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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